한국통계학회장 / 고려대 교수

2010년 8월 3일 이 창에 올려진 서생의 졸고는 ‘한국통계학회 40년, 그리고 김준보 선생님’ 이다. 김준보 선생님에 이어 항진적으로 연상되는 분이 있으니 다름아닌 한국통계학회 2대 회장을 지내신 백운붕 선생님이다. 선생님 또한 서생에게는 대은사(大恩師)가 된다. 서생은 어떠한 복을 타고나 김준보, 백운붕 선생님 같은 분을 함께 은사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인지 실로 하늘에 감사해야 함이 마땅하다.

이 글이 작성된 동기는 1994년 당시, 고려대학교 통계연구소에서 간행되던 <응용통계>에서 ‘원로와의 대담기’를 기획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필자와 고려대 박유성 교수가 그 대담자로 선정되었고 이로써 한국 통계학계의 태두(泰斗) 백운붕 선생님과 나눈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대화록은 <응용통계> 9권(1994)에 실린 바 있으나 수년전부터 <응용통계>는 발간이 중단되었고, 발간 당시에도 이는 소수의 구독자에게만 전달된 것이다.

통계학의 거목 '백운붕 선생'
이를 다시금 이 창에 기록물로 남겨두고자 하는 것은 선생님은 한국통계학계의 선두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삶 자체가 이 땅의 젊은이가 본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이 나라 통계학의 여명기에 통계학을 독학(獨學)하시고, 그리고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이 43세 나이에 홍익대 미대 학장자리를 물리치고 미술공부에 진력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만학(晩學)의 길을 떠나신 것과 같이 선생님 역시 43세 나이에 충남대 교수직을 휴직하고 미국의 명문 사학 코넬대로 만학의 길을 떠나신 것이다.

선생님은 통계학 선진국에 수학하여 오늘날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 분야에서 그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는 실험계획법, 탐색적 자료분석 등 통계적 방법론의 씨앗을 이 땅에 처음으로 씨앗 뿌린 분이다. 백운붕 선생님은 특히 실험계획법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실적을 이룩하신 것이다.

‘A randomized procedure of saturated main effect fractional replicates’ (W.T. Federer 공저로 1970년 Annals of Mathematical Statistics에 게재), ‘On a randomized procedure for saturated fractional replicates in a 2n-fractional’ (W.T.Federer 공저로 1973년 Journal of Royal Statistical Society B에 게재) 등 다수의 연구논문은 국제통계학계의 선도적 지위를 누린 저작들이다.

먼저 백운붕(白雲鵬) 선생님의 주요 약력을 살펴본다. 1922년 충남 예산 출생, 1944년 수원 농림전문학교 졸업, 1955년-1969년 충남대학교 교수, 1968년 美 코넬대학교에서 통계학 박사취득, 1969년-1988년 고려대학교 교수, 1973년-1975년 한국통계학회 2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기타 경력사항으로 日 와세다大 초빙교수, 통계청 통계심의회 위원, 농림수산부 통계심의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Annals of Mathematical Statistics, Communications in Statistics 등 국제적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십여권의 저작을 펴내었으며, 美 Mathematical Reviews의 Reviewer, 獨 Zentralblatt fur Mathematik의 Reviewer로 수백편의 논문심사를 한 바 있다. 고려대학교 학술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한 바 있다. 2005년 83세 되시던 해, 세상을 버리셨다. 대화록을 기록할 때는 선생님이 고려대학교를 정년퇴직하시고 7년 뒤가 되는 해이니 선생님 연세 72세 때의 기록이다. 대화록은 이러하다.


1.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요즈음의 건강은 좋으신지요? 그리고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건강합니다. 1주에 이틀은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현 세종캠퍼스)에 나가고 성신여대에 하루 나갑니다. 그리고 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컴퓨터로 계산도 해봅니다."

2. 선생님께서는 1955년부터 대학에 근무하셨습니다. 1950년대의 대학의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어떻게 교수를 채용하였습니까?
"휴전선 일대가 불안할 때입니다. 실제상황보다도 만약의 경우에 대한 불안이 국민들 사이에 가시지 않고 있을 때입니다. 자연히 학생들의 관심사 중에서는 병역문제가 컸지요. 취직하기도 어렵고 학비조달도 어려울 때였습니다. 대학교수 자격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족할 때였었습니다. 법적으로 초급대학(대학교 2년과정) 졸업이상이면 대학교수로 임명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교사인 사람이 대학이 생기면 대학교수로 될 수 있었을 때입니다. 나도 예산농업학교 교사에서 충남대학교수로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교수 중에는 학벌이 좋고 예전부터 사회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 있었고, 고등학교 교사에서 갑자기 대학교수로 된 사람도 있었지요. 물론 서울대나 고려대 같은 대학에는 저명인사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3. 선생님께서는 1948년 ｢농업과 원예｣(農業及園藝-日書)라는 월간지를 통해 처음으로 통계학을 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느끼셨던 통계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인상을 현재의 느낌과 비교하여 말씀해 주십시요.
"그 당시에도 통계학, 특히 기술통계학은 고등학교 수학교과서에 실려있어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분산, 표준편차 등의 계산방법과 상관계수의 계산, 이중에서도 2원 도수분포표에서 상관계수계산과 같은 복잡한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등교육 6년 과정이면 일제시대의 중학교 4년, 공등학교(대학예과) 2년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여 많은 내용이 수학교과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1948년에 통계학을 처음 접한 것은 아니고 소위 추측통계학적인 통계학에 처음 접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나의 호기심은 이러한 통계학을 공부해서 알고 싶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요새의 느낌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요사이는 그 당시와 같은 욕구가 없고 실천할 기력이 없을 뿐입니다."

4. 선생님의 '나의 統計學 修業記'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수삼일 앞두시고, 본인의 통계학 학습 역정을 담담하게 기록한 글이다. 이 글은 고려대학교 통계연구소에서 간행되는 ｢응용통계｣ 제2권 제2호(1988)에 게재되었다. 서생은 지금도 선생님의 육필원고 복사본을 지니고 있다)에 의하면 1950년대 초까지의 통계관련서적은 대부분이 日本책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통계서적 및 저널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특히, 영어권 서적 및 저널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언제부터입니까?
"1950년대까지는 日本에서는 통계학이 새로운 학문분야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들에 의한 해설서가 많이 나왔고,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 다른 책들과 같이 들어온 것이지요. 영어로 된 책의 정식수입은 거의 없었고 미국정부 또는 미국 민간단체에서의 원조물로서 상당수의 책이 들어왔고, 이중에는 수학, 통계학과 같은 책들이 끼어 있었지요. 그러나 나 자신은 이런 책에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일제 때에도 R.A. Fisher의 ｢Statistical Methods for Research Workers｣ 같은 책은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1949년에 이 책은 철도도서관(당시 서울 용산에 있었슴)에서 발견하여 빌려다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는 1930년대의 Fisher, 기타 통계학자의 저서는 구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5. 선생님께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대학에서 통계학을 강의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강의하신 내용과 사용한 교재를 말씀해 주십시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사정아래 있었으므로 필요한 통계학 교재는 마련할 수 있었던 때입니다. ｢추측통계학｣ (推測統計學 1958)이라는 등사판으로 인쇄된 교재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6. 선생님께서는 1965년 불혹의 나이인 40대에 미국 유학을 떠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학 중의 하루일과를 회상하여 주실 수 있습니까? 또, 특히 기억나시는 일들은 무엇인지요?
"나이가 몇 살이든, 순수한 학생으로 생활하였습니다. Rooming house에서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강의실까지 20분 거리. 전공분야는 같은 건물 안에서 강의가 있었으나, 수학 같은 과목은 5-6분 거리의 따로 떨어져 있는 수학과 건물까지 가서 들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Assistanship을 얻었는데 하는 일은 숙제물 점검 정도였으므로 나의 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나이 먹은 40이 넘은 사람으로서 특별한 하루 일과가 있을까 하여 던진 질문 같은데, 나는 다른 젊은 한국학생과 어울리도록 노력하였습니다."

7. 선생님께서는 한국통계학회 2대 회장을 역임하신 바 있습니다. 초창기 한국통계학회를 회고하여 주십시요.
"통계학에 관심이 있고 통계학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통계학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해 있는 사람으로는 서울대의 박홍래 교수, 최지훈 교수가 있었지요. 얼마후, 연세대학의 윤석범 교수가 계량경제학으로 U. Penn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통계학계에도 활동하였지요. 통계학과는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중앙대, 그리고 연세대에 설치되었고 통계학회는 연대, 고대가 중심이 되어 1971년에 창설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통계학회 창립노력에 관해서 한 가지 인정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 1963년에 한국통계학회 발족이 의결된 바 있었고 준비기간을 거쳐서 전국에서 임원이 선임된 바가 있습니다(그러하나 활동은 거의 전무 하였고, 이후 1971년 12월 17일 한국통계학회는 창립된다)."

8. 선생님께서는 미국 Mathematical Reviews와 독일 Zentralblatt fur Mathematik 의 reviewer를 지내셨습니다. reviewer의 관점에서 보실 때 한국통계학회의 학술지에 기고된 논문들의 장점과 단점을 말씀해 주십시요. 그리고 개선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Mathematical Reviews에는 수학의 여러분과 중의 하나로서 수리통계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Zentralblatt fur Mathematik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한국의 ｢통계학연구｣, ｢응용통계연구｣, 아마도 高大 통계연구소에서 발행되는 ｢응용통계｣도 포함되고, 대학에서의 논문집, 北韓에서 발간되는 ｢수학과 물리｣도 한글로 쓴 것이라도 Summary가 영어로 되어 있으면 대상이 됩니다. 이들 Reviews의 편집위원회에서 각국에서 그 나라 말로 발표된 논문을 리뷰하기 위해서 Reviewer가 선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논문이 미국에서 발표된 것을 리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것과 비교 운운할 수는 없지요."

9. 이제 선생님의 연구분야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의 전공은 실험계획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험계획법의 개요를 말씀해 주시고 선생님의 주 관심분야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실험계획법이라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Treatment design"이고 또 다른 하나는 "Design of arrangement", 즉 "실험단위의 배치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실험계획법은 후자를 가르키는 데 이와같은 좁은 의미에서의 중심과제는 불완비블록계획법, 이중에서도 Balanced Incomplete Block Design (BIB design), Partially Balanced Incomplete Block Design (PBIB design)의 구성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균형성(balancedness)은 분석상의 편리성, 실험의 효율성과도 관련이 있지만, 최적성(optimality)의 관점에서도 연구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는 이미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완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컴퓨터를 이용, 나아가서 SAS 또는 SPSS와 같은 통계팩키지의 등장으로 분석상의 편리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실험을 실시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비용문제를 고려할 때 고전적인 실험단위배치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계학에서 실험계획법의 중요성은 통계학의 대석학 C.R.Rao와 DeGroot와의 대화에서 밝힌 다음의 답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DeGroot : What do you think are the important trends in contemporary statistics? Where do you see the field going? Where do you think it should be going?

Rao : Those are questions about which I am constantly thinking. I believe the two great methodologies in statistics are sample surveys, which is essentially collecting existing information, and design of experiments, where you generate observations to provide information on some given questions. Different types of data analyses are of course, then applied depending upon what the statistician thinks is the right thing to do. They are not as fundamental as the data which are collected through principles of design and sample surveys. If data are good, results should be obvious; the analysis is to convince somebody that there is a real difference and so on.
<Statistical Science Vol. 2, 1987, page 65-66.>

'Treatment design'의 대상은 물론 요인실험(Factorial experiment), 이중에서도 부분실시법(Fractional replication)이 연구대상으로 됩니다. 이것은 품질관리분야에서 특히 "Taguchi method"라는 것에서 많이 응용되고 있으며, 학술잡지 ｢Technometrics｣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나의 학위논문의 일부가 부분실시법에 관한 것이고 그후 요인실험에서의 확률화문제(Balanced factorial experiment)를 연구해 왔으며, 근래에 와서는 불완비블럭계획에 대한 분석에 컴퓨터를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왔습니다."

10. 실험계획법에 있어서 최근의 경향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선생님의 최근 관심사는 무엇인지요.
"위의 답변에서 짐작할수 있을 것입니다. 불완비블럭계획에서의 통계분석문제입니다.(Intra-block analysis, Inter-block analysis). 이와 같은 문제는 컴퓨터의 이용에 의해서 쉽게 해결됩니다. 물론 실험자의 입장에서 실험의 실시와 이때의 자료수집에 소요되는 비용이 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럭실험에서의 균형성, 최적성과 같은 특성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Taguchi방법의 응용에 있어서는 부분실시법으로서 선택된 처리조합을 다른 외부조건아래에서 반복 실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에도 효율성, 최적성은 중요한 연구대상이 될 것입니다. 실헙계획법은 현재도 많이 응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품질관리공학에서는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실험계획법의 실천상의 여러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11.선생님께서는 ｢응용통계연구｣ 제7권(한국통계학회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제7권이 간행된 해는 1993년)에 대학 통계학과의 역할에 대한 논문을 기고하신 바 있습니다. 요즈음 통계학의 아이덴티티(identity) 문제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 볼 때 통계학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통계교육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통계학의 나아가야 할 방향 같은 것을 내가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통계학 발전의 흐름에 따라서 발전할 것이고, 통계학의 중요성과 밝은 장래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통계학과에서의 학부학생들에 대한 교육, 대학원에서의 교과과정 운영방침같은 것은 논의대상이 됩니다. 지금과 같은 통계학과 운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통계학과 교수진이 자신들이 받은 교육방법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인식아래 현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될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해내야 합니다. 통계학과가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우리나라뿐은 아닙니다. 물론 문제발생의 원인과 실정은 다르겠습니다. ｢AMSTAT NEWS｣, August-September 1994, No.212(미국통계학회에서 간행하는 학술지)에 실려 있는 President Corner를 읽어보십시요. 제목부터가 놀랄만한 것입니다. 즉, 'Statistics Departments under Siege'."

12. 끝으로, 통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후학들을 위하여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주십시요.
"통계학이 무조건 좋아서 재미있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동기에서든 통계학과에 지원하여 현재 재학 중인 학생, 그러나 통계학을 공부하여 무엇을 할수 있을 것인가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부전공을 택하여 공부할 것을 권고합니다. 부전공이 생물학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통계학을 전공한 자이면서 생물학전공자, 이런 사람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경제학을 부전공한 사람이 유능한 상경계출신자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지 않습니까."

백운붕 선생님과 대화를 끝낸 시간은 저녁 10시경이었다. 저녁식사를 곁들인 긴 대화를 통해 서생은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또한 그러한 것이다. 무릇 ‘청(靑)이 남(藍)에서 나되 남(藍)보다 낫다’ 라는 말이 있거늘, 서생은 대은사(大恩師) 백운붕 선생님에게 진청(眞靑)이 못되었음은 물론이요, 서생의 학생들에게 진남(眞藍)도 못된 것이다.

선생님이 세상을 버리신 뒤, 고려대 김기영 교수님은 선생님을 추모하며,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글을 남기셨다. 이글은 한국통계학회 <응용통계연구>(2005)에 실려 있다. 글은 이러하다.
<故 白雲鵬 선생님을 추모하며>

내 어인 복이 있어 통계학자로 이 땅에 으뜸이요, 마음씨 어질기로 일등 가시는 분을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었을까? 이런 마음 일어날 때마다 의례 손 모아 절 올리는 일이 가장 마땅할 뿐이라는 생각만 가득합니다. 누구나 세상에 나면 그저 한동안 머물다 정해진 시간 되어 떠나간다지만 선생님과의 옛 일들은 귀한 기억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사모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선생님은 마음 바탕이 연하시고 순수하여 하시는 일 마다 거침이 없으셨고, 그 자유로움이 낳은 향훈은 늘 주변을 이롭고 편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함이란 응당 여러 겁을 거쳐야 이루어지지 어찌 당대에 애쓴다고 될 일이겠습니까. 백운붕 선생님, 이 분이 보이신 그 모두가 얼마나 중한 울림이었는지는 아지랑이 다 사라진 이제야 비로소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절로 아름다운 분의 뜻은 열성으로 구하려 해도 새길 기회를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러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은 어떠하겠습니까.

팔순이 넘으셔도 당신 손길 기다리는 병약하신 부인 시중에 지성을 다 하셨고, 1남 4녀의 자손들에게도 하나같이 인자하고, 슬기로운 아버지로서의 책무에 소홀함이 없으셨습니다. 저희들 모두 선생님께서 마나님 먼저 잘 보내시고 떠나시리라 믿었는데 한 삶이 가지는 세월을 어찌 그리 쉽게 예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잔잔한 눈, 빙긋한 미소, 다정한 음성, 훤칠한 키의 수려하신 용모, 약간 오다리의 느릿한 걸음걸이... 이 모습이 오래 남을 우리 선생님의 잔영이십니다. 고려대학을 정년 하신 후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 나날 속에서도 당신 스스로에로의 침참과 관조의 세계에 머무실 수 있었음을 그저 저희들의 작은 위안으로 삼을 따름입니다.

이 땅에서 통계학이 점하는 위상 뒤에는 이 학문이 도입된 여명기에 일익을 하셨던 분들의 공을 지나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백운붕이라는 진솔하고 영민하며, 그리고 정열적인 학자 한 분을 가지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충청도 과수원 댁 큰 아드님으로 나서 일찍이 수학자를 꿈꾸셨던 백운붕 선생님은 1940년대 후반 농업수학 교재에서 처음으로 통계학의 한 모퉁이에 접하셨고, 곧 이어 만난 Snedecor 교수로부터 받은 격려와 지도는 통계학자가 되려는 결심에 더 큰 발걸음을 떼게 하였습니다.

특히 Snedecor 교수로부터 접한 Fisher의 연구결과는 이 분을 본격적으로 통계학의 세계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적극 추천으로 불혹의 나이에 노모를 포함한 가족을 남겨둔 채 해외유학을 결행하게 됩니다. 그냥 학문을 하려면 뜻을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나머지 모두를 포기하는 결심과 꾸준한 노력만 뒤따르면 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선생님께는 여기에 덧붙여 모른다는 진솔함을 바탕으로 그 무엇이나 널리 받아 수용하는 인품과 이로 인해 다른 이들로부터 남다른 가피를 받은 분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분에게 세상이 내민 손은 Federer 교수의 도움이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 분과는 평생토록 사제이면서 동시에 연구 동료가 되어 나머지 생을 학문의 길에 같이 매진하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실험계획법은 백운붕 선생님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고, 특히 여기에서 중심과제 중의 하나로 인식되는 불완비 블록계획법에 관한 독보적 연구는 선생님의 석박사 학위논문의 일부와 곧이어 발표된 연구결과들을 통해 사실상 이 분야의 이론발전에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당대의 제일가는 통계학자라 함은 이렇듯 한국 통계학의 첫 출발점에서부터 당신의 연구영역에서 우뚝 선 분이였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애써 신학문을 닦아 고국으로 돌아오신 후 자리한 고려대학에서 수무해, 통계학에 뜻을 세운지 반평생. 이 세월은 선생님께서 애초부터 계획하셨던 학문연구와 후진양성, 그리고 사회헌신으로 정교히 짜였습니다. 때로는 학회장으로, 때로는 학장으로써, 국제유명 논문지에 Reviewer로, 그리고 국가적 통계정책 입안자로써 봉사하셨으며, 한국통계학회에는 그 창립부터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이렇듯 한국통계학계의 발자취를 차례로 쫒아가 보면 끝내는 선생님의 자취로 한참 뒤 덥혀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생에 걸쳐 배우고 익혀 이를 공들여 전하는 일을 즐겨 하셨으며, 그 앎이 널리 유용하게 쓰이게 함으로서 후학들에게 당신의 정열과 지혜를 모범되게 이끄셨으니 말 그대로 그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고고한 학자가 아니겠습니까.

"나의 통계학 수업기“에 남긴 선생님의 말씀을 여기에 되 뇌입니다. 통계학인으로 ”40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 통계학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계학은 단순한 형식과학이 아니다. 실천과학인 것이다. 항상 새롭게 발전하는 이론과 실천문제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살아있는 과학임을 절감할 따름이다.” 늘 변화하는 세상의 실상을 왜곡 없이 충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통계학인은 부릅뜬 두 눈으로 어떠한 논리적 잣대를 어떻게 정교히 놓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함을 이르신 것이리라 짐작됩니다.

생기고 소멸함이 우주에게는 어느 하나 보탬도 뺌도 되지 않는다는 철리를 쫒아 선생님께서는 그 많은 제자와 후학들에게 소중한 유산을 남기고 그 덜은 짐만큼 허허로이 긴 여정에 나셨습니다. 이승에 한참 머물던 큰 어른 새가 흰 뭉게구름 되어 여기에서 인연했던 모든 것들을 훌쩍 거두고 높은 하늘로 상서로이 흘러갑니다. 오래 오래 선생님의 마음 받은 이 땅의 많은 분들의 글썽이는 눈망울을 기억하면서. 2005년 9월.

백운붕 선생님께서 남기신 저서는 이러하다.

<統計的 方法(공저)>(향문사/1962), <經營統計學>(박영사/1973),
<標準統計的 方法>(박영사/1973), <實驗計劃法>(박영사 1974), <統計學>(박영사/1975), <實驗計劃法入門>(박영사/1978), <要因實驗의 計劃과 分析>(고려대 출판부/1981), <데이터分析法>(박영사/1982), <최신 통계적 방법(공저)>(법경출판사/1986)
<EDA-탐색적 데이터 분석(공저)>(박영사/1987), <SAS 일반선형모형 분석> (自由아카데미/1987), <SAS/IML 행렬에 의한 통계분석>(自由아카데미/1992>
<선형모형의 이해와 계산>((自由아카데미/1995), <통계학 개론>(自由아카데미/1996),
<품질을 좋게 하는 방법: 다구찌 방법의 해설> (自由아카데미/1997),
<실험의 계획과 분석>(自由아카데미/1998)
<선형모형의 이해 -특별부록 : 나의 統計學 修業記> (교우사/2005)

선생님께서 세상을 버리시던 해, 선생님의 주요 저작의 하나인 <선형모형의 이해와 계산>을 다듬어 재출간하는 일을 자청하게 된다. 그해 신년 인사 때 서생이 감히 제안드린 것이다. 같은 학과 동료인 김기환 교수와 같이 수개월간 책을 다듬어 재출간 한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그 책의 재출간 책머리 글을 쓰게 된다. 선생님이 명하신 것이다. 글은 이러하다.

이 나라 통계학의 여명기인 1950년대 이래 작금에 이르도록 이 땅의 통계학계의 지적 성숙을 위하여 노심초사해 오신 白雲鵬 선생님의 대표 저작물 중 하나를 이렇듯 재출판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소생은 그 심부름을 한 소이로, 선생님의 명을 받아 감히 재출간 책머리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중략)

이 책은 백운붕 선생님의 주요 저작의 하나인 ‘선형모형의 이해와 계산’을 다듬어 재출간하는 것입니다. 이 땅 출판업계의 여건상 가치있는 저작물이 남아 전하지 못하는 데 아쉬움을 갖고 있던 차에 교우사의 오판근 사장님의 호의에 의하여 이 책이 재출판되게 되었습니다. 오판근 사장님을 비롯한 교우사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책말미에 십수 년 전 백운붕 선생님께서 남기신 육필 원고 ‘나의 통계학 수업기’를 부첨해 재출간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소생은 이제 이런 글귀로 재출간 책머리 글을 거두려고 합니다. 周易 中孚 괘에 "우는 학이 그늘에 있다. 그 새끼가 화답한다(鳴鶴在陰其子和之), 내게 좋은 술잔 있으니 너와 함께 취하리라(我有好爵吾與爾靡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직도 후학들에게는 '그늘에서 우는 학'이십니다. 2005년 5월. 門下 최종후 삼가 씀.

그러나 안타깝게도 책이 출간된 것은 선생님이 세상을 버린 뒤였다. 서생은 선생님 자제분에게 책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