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자체 기술력 확보로 IBM 독점적 지위 상실
신뢰 상실하는 공격적 마케팅으로 제살 깎아 먹어

한국IBM이 국내에 처음 들어왔던 60년대 말 국내 은행들은 정보시스템을 이용한 전산화 작업에 강한 열망을 표시하고 있었다.

일본의 주요 도시은행들이 IBM, 유니시스, 파콤 등 메인프레임을 도입해 인사관리는 물론 복잡한 예·적금의 복리 이자계산까지 척척해 내는 모습은 국내 뱅커들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의 도시은행들은 메인프레임으로 본·지점간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해서 고객이 언제 어디에 있든, 지점만 찾아가면 자신의 계좌에서 돈을 찾거나 이체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의 등장은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으로 다가왔다.

특히 은행원들은 더 이상 마감 시간이후 잔고를 맞추기 위해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해야 할 필요도, 수기통장(통장프린터 인자가 아니라 은행원이 직접 기장하는 통장)의 오작성에 대한 두려움도 떨칠 수 있는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 1990년 이전 - 한국IBM = 전략적 파트너
이렇게 시작된 한국IBM과 국내 은행과의 인연은 한마디로 ‘돈독’했다.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놀라운 성능과 앞선 기술력 그리고 일본IBM에서 이미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은행 온라인 시스템 등의 계정계 프로그램 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국내 금융권이 한국IBM을 신뢰할 수 있는 매력적인 파트너로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국내 은행에 처음 온라인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은 1972년, 외환은행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여타 시중은행들도 온라인 시스템 구축 대열에 합류하면서 금융결제망의 근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은행의 전산화에 이어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이 생보업계 처음으로 1971년, 증권코드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후 계약업무와 수금업무 등을 전산화하면서 수기 작성에 따른 오류를 최소화시키기 시작했다.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도 손보업계 처음으로 1976년부터 업무전산화에 착수해 1977년에 장기보험의 계약입력과 증권발행을 전산화했다.

당시 은행은 물론 증권, 보험사들은 모두 일본 금융계의 IT시스템을 모델로 삼은 만큼 일본IBM의 전산 프로젝트 경험은 국내 금융회사들이 추가적인 기술사용료를 지급해서라도 도입해야할 핵심 기술이었다.

그리고 한국IBM은 국내 금융권의 기술적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서 필요한 기술을 공급한 성실한 파트너 역할을 해냈다.

# 1990년대 - 한국IBM = 기술적 우위를 확보한 파트너
70~80년대 한국IBM은 선진 IT기술을 공급하는 ‘화수분’ 같은 존재였다.

은행, 증권, 보험, 카드사 등 업계 최초로 만들어지던 정보시스템의 상당부분은 IBM이 수행했으며, 수용능력을 벗어날 만큼 수주물량이 많아 오히려 한국IBM에서 프로젝트를 거절해야 할 형국이었다.

그 같은 상황은 한국IBM의 초기 감사보고서에 나타난다.

설립 초기 최초 5년간 적자를 기록했지만 금융권 및 기업들의 전산수요가 집중되던 1970년대 초중반 이후 한국IBM은 흑자로 전환했으며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 같은 흐름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처음 만들어 운영하던 시스템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변화하는 금융환경을 반영한 차세대 시스템을 검토하면서 시작된다.

이전까지 증권의 기간계 시스템과 은행의 대외계 시스템 등은 듀얼 시스템으로 설계된 탠덤 컴퓨터가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고, 전 금융권의 기간계 시스템 및 정보계 시스템은 모두 IBM이나 유니시스의 메인프레임으로 구축돼 있었다.

균열은 은행의 정보계 시스템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90년대 후반 들어 일부 후발은행들은 오픈 환경의 정보계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룹웨어 및 리스크 관리시스템을 도입하면서부터 오픈환경을 경험한 은행들은 데이터 웨어하우스(DW) 및 고객관계관리시스템(CRM) 등 분야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또한 90년대 후반 들어 휴렛팩커드와 컴팩, 디지털이퀴프먼트 등의 한국 지사들은 DW와 CRM에서 금융권 시장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금융회사들은 전산투자 비용을 줄인다는 장점을 취하고, 비(非)IBM 외투법인들은 금융권 구축사례라는 구하기 힘든 경력을 얻게 되는 게임이었다.

# 2000년 이후 - 한국IBM = ‘공급사 중 하나’

정보계와 서브시스템에서 유닉스 시스템을 도입했던 은행 및 2금융권 회사들이 2000년대 들어 기간계를 다운사이징하기 시작했다.

은행권에선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트랜잭션 규모가 작은 국책은행들이 계정계 다운사이징 사업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외환은행이 다운사이징을 결정하면서 계정계 컴퓨팅 시장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최초의 온라인시스템, 최초의 카드계 시스템, 최초의 24시간 CD망 운영 등 ‘국내 은행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다수 가지고 있는 외환은행은 대형 시중은행 처음으로 계정계를 다운사이징 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시중은행들은 비용대비 효과라는 ‘가성비’ 측면에서 계정계 다운사이징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계정계의 안정성’이라는 핵심가치를 건드리면서까지 무리하게 오픈환경으로의 전환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 물길을 외환은행이 터주고 확인시켜 주면서 은행 계정 시스템의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어 유니시스의 지사 철수로 하드웨어 및 유지 보수의 단절이 불가피했던 신한은행, 농협중앙회, 수협중앙회 등도 또 다른 메인프레임인 IBM을 선택하기보다 오픈 환경을 선택한다.

이 같은 흐름은 자연스럽게 보험, 증권, 카드 등의 2금융권으로 전파되었다.

한국IBM의 위상이 이처럼 급전직하하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다양한 전산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자체적으로 양질의 IT인력을 확보하게 됐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0년 이후 국내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컴퓨터공학 및 전자계산학과를 만들었고, 여기서 배출된 인력이 토대가 돼 금융권 IT인력의 중추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한국IBM만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술적 우위의 상실을 의미한다.

메인프레임 이외의 오픈소스 환경의 다양한 기술이 등장하면서 IBM이외의 새로운 전문가집단이 금융회사에서 성장한 것이다.

둘째는 이휘성 사장 시절, 무리하게 매출을 끌어올리지 위해 시행했던 ‘OIO(Open Infrastructure Offering)’와 ‘SLR(Software License Review)’ 프로그램의 결과, 고객들의 신뢰를 잃게 됐다는 점이다.

OIO프로그램은 외형상 가격에 대한 할인 및 일괄적인 소프트웨어 및 장비의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고객이 체감하는 할인율은 그리 높지 않고 IBM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킨다는 한계는 노출시키고 있었다.

SLR프로그램은 정품소프트웨어 사용과 관련, IBM에게 주도권이 있는 이슈였지만,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고객과 공급사간의 신뢰를 허무는 ‘넘지 않아야할 산’을 넘는 결과로 다가왔다.

두 프로그램은 모두 한국IBM 매출에 도움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은행은 물론 2금융권의 탈 메인프레임, 탈 IBM 경향을 강화시키는 결과도 같이 낳았다.

셋째는 IBM이 그동안 줄곧 유지했던 비탄력적인 고가의 가격정책으로 인한 고객들의 지속적인 불만이다.

IBM과 최초 균열이 일던 1990년대, IBM 이외의 하드웨어 및 솔루션 공급사들은 한국에서 공급되는 IBM 메인프레임 등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가격이 미국 등의 국가에서의 가격과 다르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어필했고, 이후 일본IBM과의 가격 차이를 확인한 국내 금융권은 가격 조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객관적인 자료를 근간으로 한 한국IBM측의 설명이 있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납득하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수긍할 수 없는 이중적 심리상태가 한국IBM과 국내 금융권 사이에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중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시사주간지 '신세기주간' 2014년 23호에 따르면 중국의 은행들은 IBM장비를 구매할 때 가격협상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중국 컨설팅업체 CCID 자료를 인용하면서 “2011년 중국의 메인프레임 시스템의 평균 매입가격은 미국의 2.4배나 됐다”(이코노미 인사이트 2014년 8월1일자 재인용)고 보도하고 있다.

# 상거래의 기본은 '신뢰'
모든 거래의 기본은 신뢰관계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관계 자체가 사라진다.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일종의 생태계가 사라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여기서 ‘생태계’란 거래의 갑을 관계와 거래 질서 및 규칙 등 상거래 전반을 의미한다.

한국IBM이 국내에 들어와 영업을 펼친 지난 50년 동안, 그 절반의 시간은 IBM이 주인공 내지는 돈독한 파트너로 생태계에 존재했다.

그러나 그 생태계에서의 지위는 이후 시간 동안 사라져갔고 2000년대 중후반이후 IBM이 만들었던 금융권 시장의 생태계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신뢰의 토대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손무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를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는 도리(道理), 천은 천시(天時), 지는 지리(地理), 장은 장령(將領), 법은 법규(法規)를 의미하는데, 모두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천시와 지리를 알아야 하고, 좋은 장수와 엄격한 군율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천, 지, 장, 법은 쉽게 이해되지만 전쟁과 ‘도(道)’는 연결이 쉽지 않다.

중국의 학자 리링의 ‘손자병법’ 해설서 ‘전쟁은 속임수다’에는 다음처럼 이 대목에 대한 해설이 쓰여 있다.

“도의는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과 뜻을 같이하여 함께 죽거나 함께 살면서도 배신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도의는 민심의 향배를 의미하고 인심을 얻는 사람은 천하를 얻고, 인심을 잃는 사람은 천하를 잃는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말이면서 가장 어려운 말이다.

지금 한국IBM은 자신들은 향한 민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민심을 얻을 것인지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이다.

<김승호 BI코리아 편집위원>skylink9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