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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원CEO포럼
“이런 지도자가 그립다”김상문 (주)인광 회장 영림원CEO포럼 강연
박시현 기자  |  pcsw@bi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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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3.08  1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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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친환경 기업인 (주)인광의 김상문 회장(사진)은 1990년대 10여년간 사업차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같은 의문을 품어왔다. 중국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저우언라이를 꼽는 것을 보고, 그 인물에 주목했다.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기에 이런 찬사를 받는 걸까. 김 회장은 직접 2005년 5월에 <저우언라이>라는 책을 펴내고 중국의 힘의 원천은 ‘훌륭한 지도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 회장은 최근 열린 ‘61회 영림원CEO포럼’에서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리더-저우언라이(主恩來)의 일생과 그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제목으로 강연했다. 김 회장의 얘기를 담아본다.

◆“중국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시가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장한가와 비파행 등의 작품을 남겼다. 스물살의 나이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백거이는 여러 직을 걸쳐 소주자사(蘇州刺史)로 부임되어 가는 길에 나무위에 앉아있는 고승을 만났다. “위험하니 내려 오시라”고 하니 그 고승이 “네가 더 위험하다. 얄팍한 지식이 하늘을 찌르는구나”라고 했다. 고승의 내공에 놀란 백거이가 좋은 말씀을 부탁하자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했다. 나쁜 일 하지 말고 좋은 일 하라는 뜻이다. 세살 먹은 얘도 다 아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나쁜 일 하지 말고 좋은 일 하라”는 말을 정작 행하기가 어려운 게 인생이다.

백거이는 이 말을 듣고 인생관이 바뀌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이처럼 지행합일을 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이를 철저히 지킨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장쑤성 화이안(江蘇省 淮安)부에서 태어나 1976년 향년 78세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는데 그가 남긴 유산은 80만원이었다. 혁명열사의 자녀들을 양자로 들여 보살폈으며, 말년에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끝까지 국가행정에 힘을 바쳤으며, 죽어가는 등소평을 살려내 개혁개방의 길을 텄다. 양자로 들여 보살폈던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전 이붕 총리였다.

저우언라이가 태어난 1898년은 1895년 터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한 해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몰락한 관료집안의 하급 관리였는데 쌀과 돈이 떨어져 전당포에 출입이 잦은 생활을 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孫文)을 추종하는 지식인이자 혁명가였던 외삼촌의 권유로 1917년 당시 욱일승천의 나라였던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일본 유학 시절에 저우언라이는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고, 구국의 길이라고 여겼던 군국주의는 중국의 희망이 될 수 없다는 2가지 큰 사상의 변화를 겪는다.

◆지행합일한 사람 ‘저우언라이’ = 1919년 귀국한 뒤 난카이대학 재학중 5.4운동에 참가해 퇴학을 당하고 1920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저우언라이는 당시 중국의 엘리트였던 주더(朱德), 덩샤오핑(鄧小平) 등과 사귀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평생의 반려자로 덩잉차오를 만나 결혼한다. 이 부부가 모범으로 보여준 8호(八互) 정신은 한번 되새겨봄직 하다. 8호 정신은 ‘서로 사랑하기, 존경하기, 돕기, 격려하기, 의논하기, 신뢰하기, 이해하기‘이다.

저우언라이는 1924년 귀국해 쑨원이 세운 항일전사 간부학교인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부 교관으로 활동한다. 중국공산당은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陣獨秀)의 주도로 창당된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호남성의 책임자로 참가했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상하이 노동자 봉기, 난창 봉기를 주도하고, 1932년에는 장저우 전투에서 공산당 역사상 첫 승리를 거뒀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의 계속되는 공산당 토벌작전으로 새로운 근거지를 찾는 ‘대장정’에 돌입하게 된다. 대장정은 1934년 10월부터 1936년 10월까지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에서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까지 총 2만5천리를 행군했는데 8만7천여명으로 출발한 병력 중 도착한 인원은 7천여명 뿐이었다.

대장정은 공산당 혁명의 기초를 다지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홍군들은 대장정 기간 동안 농가를 지나가면서 농작물이나 여자에게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뒤쫓는 국민당은 약탈을 일삼았다. 농민들에게 “우리 군대는 홍군이었으며, 장제스의 국민당은 민심이 떠난 군대”였다.

여담으로 중국은 상하이와 옌안 등 2개 지방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공산당이 창당했던 곳이며, 옌안은 무척 어려웠던 시기를 겪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엔 옌안이라는 지명이 많다.

◆마오를 1인자로 추대, 자신은 2인자의 길 = 1935년 중국공산당에 역사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바로 쭌이(遵義) 회의이다. 저우언라이는 이 회의에서 당시까지 유지했던 집단지도체제에서 1인 지도체제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그 인물로 자신보다 두 계급이나 아래였던 마오를 추대하고, 그 자신은 자청해서 2인자의 길을 걷는다.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장면이다. 마오는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 중앙 권력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이후 1936년에는 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한다. 국민당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산시성의 성도 시안에 납치해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저우언라이는 옌안에서 달려와 국민당과 협상에 참여해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게 된다. 이 시안사변으로 중국공산당은 소생하게 되고, 장쉐량은 중국공산당의 영웅이 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마오쩌둥은 당 주석, 저우언라이는 총리에 취임한다. 마오는 이 날 천안문 성루에서 “중국 인민이 일어섰다”며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중국은 1958년부터 마오의 주도로 대약진운동을 벌이는데 2,500만명이 아사하는 참혹한 실패로 끝난다. 펑더화이(彭德懷)는 이 책임을 물어 마오를 공격하고, 마오는 국가 주석에서 물러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됐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마오가 주도한 문화대혁명은 극좌 사회주의 운동으로 한마디로 ‘미친 바람’이었다. 마오는 중ㆍ고교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내세워 중국을 뒤집어 놓는다. 홍위병을 막으면 타도 대상이 됐다. 1959년 국가 주석을 지낸 류사오치(劉少奇)는 문혁 때 사망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후진타오 주석과 시진핑 부주석은 학교도 못 다닐 정도였다.

◆求同存異ㆍ大觀細察 원칙 견지 = 이런 광풍 속에서도 마오는 “저우언라이는 건들지마라”고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몰아 세웠다. 위기에 몰린 덩샤오핑을 위해 저우언라이는 마오에게 “우리가 죽더라도 누가 인민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덩샤오핑은 살려야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덩샤오핑 일가는 4년간 귀양살이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준비하게 된다.

중국의 외교사에서 20세기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 벌어진다.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죽의 장막’이라는 중국에 대한 적대적 이미지가 벗겨졌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저우언라이가 1954년에 실리외교를 강조하며 처음 구사한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구동존이는 “이견이 있으면 일단 미뤄 놓고, 의견이 같은 부문부터 협력한다”는 뜻이다. 이는 상대국의 내정에 대해선 일체 간섭하지 않고 가능한 분야만 협력하는 일관된 외교 정책으로 이어졌다.

저우언라이는 나라살림의 원칙으로 대관세찰(大觀細察)을 지킨 인물이었다. 대관세찰은 “큰 시야를 갖되 언제나 자세히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뜻은 “매사에 ‘대충’, ‘아마도’라는 말은 삼가기 바란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큰 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는 저우언라이의 말에 함축돼 있다.

저우언라이의 대관세찰 원칙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닉슨 대통령 방문시 탁구 경기를 보다가 빠져나가 “다음날 만리장성 유람에 차질이 없도록 가는 길에 쌓인 눈을 치워 놓도록 지시하고 왔다”거나 곧 만찬을 앞두고 난데없이 국수를 찾은 행동에 의문을 품은 호텔 주방장에게 “손님 대접에 차질이 있을까봐 그랬다”고 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닉슨은 이를 두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언제나 세세한 일까지 직접 챙기며 우리를 환대했다. 그의 세심한 노력이 어렵게 성사된 회담을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저우언라이의 역사적 역할은 ‘2인자 리더십’ = 저우언라이의 역사적 역할을 축약하는 말로 아마 ‘2인자 리더십’만큼 적합한 표현도 없을 듯 싶다. 마오를 지지해 1인자로 추대하고 자신은 기꺼이 2인자의 길을 걸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뚱을 통해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고자 했으며, 덩샤오핑을 통해 ‘미래의 중국을 설계’하고자 했다. 진정한 리더들은 스스로를 절제하며, 다른 사람의 성공을 도와주는 2인자로서의 모습도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우언라이는 인민의 벗이었다. 예를 들면 13릉 댐 건설 현장에서 직접 손수레를 끌면서 노동자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왜 총리가 이렇게 일 하느냐는 질문에 “노동자로 일하러 왔을 뿐이다...책임자인 당신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일할 것이다”라도 말할 뿐이었다.

저우언라이는 근검절약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밥상에 채소 2가지만 올리고, 무명옷 한 벌을 기우고 또 기워서 입었다. 그리고 새로 수리한 집에 새 물건을 들여 놓았는데 이를 모두 들어내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집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일화도 남겼다.

친척관리도 철저했다. 1조. 일부러 우리 부부를 보러 올 수 없다. 3조. 모든 친척은 식당에서 줄을 서서 식권을 구입한다...10조. 사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거나 특권화하지 않는다 등 10조 원칙을 세운 점에서 이를 읽을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인민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철저히 자리관리를 하는 검소한 생활, 인민을 위한 진정한 총리, 인만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생각해주는 친구 같은 총리였다.

그런데 저우언라이에게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자신을 돌보는 것에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하루에 17시간 혹은 21시간을 일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업무 수행은 과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심장병으로 발전했으며 1972년에는 암 선고까지 받았다.

◆“중국의 힘의 원천은 훌륭한 지도자” = 1974년 1월 입원해있던 587일간 14번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머리맡에는 늘 서류더미가 수북했다. 587일간 220명의 사람을 만났고 32차례 회의, 65차례의 외국 손님 접견을 했다. 접근은 매번 약 1시간 정도였으며 가장 긴 회의는 3시간 45분짜리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저우언라이는 “나는 이제 더 돌보지 말고, 다른 환자들을 돌보라”고 하면서 1976년 1월 8일 끝내 숨을 거뒀다. 그는 매장하지 말고 화장해서 유해를 조국 산하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매장하면 기념관을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인민의 수고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1989년 일본 청소년연구소에서 출판한 ‘중국인의 가치관 연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중국인 노인층의 84.5%, 중년층 63.5%, 청소년층 50%가 저우언라이를 1위로 꼽았다.

발트하임 유엔사무총장은 그의 죽음을 애도해 1주일간 조기를 달 것을 제안하면서 “어떤 국가의 총리가 그처럼 평생토록 국민을 사랑했겠는가. 그는 외국 은행에 동전 한 푼도 예치하지 않았고, 개인통장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닉슨 대통령은 “마오쩌뚱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을 다 타서 재가 되고 말할을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 전 국무장관 키신저는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라고 칭송했으며, 중국 문제 전문가 딕 윌슨은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뛰어났으며, 가장 성공적이고 완벽했던 정치가”라고 평했다. 직무수행 능력, 개인 품성, 애국심 면에서 흠잡을 게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도자가 그립다.

<박시현 기자> pcsw@bikorea.net

 
영림원 CEO포럼은 2005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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