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기업의 해법은 ‘시장 밑바닥 경험’
금융산업, 로엔드에서 혁신방법 찾아야

근대의 역사는 ‘창조적 파괴’에서 비롯되었다. 근대는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대가 만들고자 한 세계는 세속과 성스러움의 갈등이 필요 없으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또한 신분적 구속 없이 소유와 생산관계를 ‘자유’의 개념에서 설명하는 세상이다.

이와 함께 근대는 익명성의 시작을 예고하는 동시에 개인을 중요시하면서 공동체의 성격도 바꿔 놓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혈연과 지연 중심의 공동체는 세력을 잃어갔으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가 공동체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근대성은 온건하고 민주적인 것이든 혁명적이고 권위적이며 상처를 남기는 것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항상 ‘창조적 파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 없듯이 새로운 사회 형태를 만들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옛것을 능가하거나 그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근대 도시의 시작을 파리로 보고 있는 그는 1848년에 주목하고 근대를 추적해간다.

그 무렵의 파리는 정치, 경제, 생활, 문화에서 철저한 단절이 일어났고, 중세적 도시는 강제적으로 근대화에 나서게 된다.

전 세계 인구 73억 중 절반이 넘는 38억 정도가 살고 있는 근대적 도시의 개념은 파리를 근대도시로 탈바꿈 시킨 오스망 남작으로부터 시작됐다.

1848년 혁명의 공간을 거치면서 파리는 그를 통해 ‘근대’의 전형이 됐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래서 데이비드 하비는 이러한 단절을 과거와 상관없거나 과거가 끼어들더라도 그것을 망각하고 새로운 것을 기록할 수 있는 백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근대의 구분점은 학자에 따라 다르다. 일부의 사람들은 1780년대가 근대 사회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눈에는 영국 경제가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는 산업혁명의 시작과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앙시앙 레짐이 전복되는 과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근대를 구분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하지만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날 뿐 근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동일하다.

그것은 근대가 이전의 역사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단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단절은 요제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가 제시한 개념인 ‘창조적 파괴’가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라는 시대구분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적 파괴’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현상이다.

# 이종격투기와 창조적 파괴
최근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미래금융업은 이종격투기”라고 정의한 바 있다.

가장 잘하는 기술을 섞어서 장르에 상관없이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점에서 이종격투기가 전체 격투기 시장을 평정했듯이 미래의 금융시장도 이종격투기 같은 상품 내지 기업이 평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런 그의 설명은 영국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Campbell Douglas Ferguson)의 ‘금융의 지배’라는 책을 통해 뒷받침된다.

이 책에서 퍼거슨은 금융 산업의 발전을 진화론적으로 풀이하면서 현재의 우리를 금융계의 ‘대멸종’ 단계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대멸종에 대한 그의 시각은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 금융을 경색시켰던 지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새로운 환경에 맞춰 등장하는 종 분화(새로운 DNA로 무장한 종의 출현) 과정에서 자연계처럼 돌연변이가 등장하고 있고 또한 생존을 위한 자기혁신 과정에서 허약한 기업들이 끊임없이 사라져 가는 창조적 파괴를 근거로 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엽은 19세기 초중반 ‘근대’가 시작되던 시기보다 더 빠르고 더 광범위하게 창조적 파괴가 진행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전사회적 현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창조적 파괴는 은행, 증권, 보험, 카드 등의 전통적 구분법을 의미 없도록 만들었다.

즉 전통적인 격투기인 권투와 레슬링 등의 스포츠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기간 중에 TV를 통해 중계되는 화면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일반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듯이, 은행-증권-보험- 카드라는 구분도 금융소비자의 시선을 더 이상 끌지 못할 만큼 매력을 상실한 것이다.

대신 실제 싸움과 유사한 스포츠인 이종격투기처럼, 미래의 금융업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상품을 선별해서 벽을 허문 융복합형 상품을 통해 고객을 끌어당길 것이라고 황 회장은 전망하고 있다.

이것이 금융업의 창조적 파괴이자, 파괴적 혁신의 과정인 것이다.

# 금융업의 혁신은
초저금리의 상황에서 극한의 경쟁을 펼치는 은행, 중계수수료까지 없애가며 경쟁해야 하는 증권사, 시장은 포화상태인데 인구마저 정체돼 성장 가능성이 암담하기만 한 보험사.

이것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국내 금융시장의 자화상이다.

‘파괴적 혁신’의 주창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은 수년 전,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계에 달한 기업이 성장 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시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밑바닥은 ‘하이엔드(high-end)’에 대비되는 ‘로엔드(low-end)를 의미한다.

성장하는 기업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하이엔드‘를 지향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출시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예기치 않은 경쟁자가 들고 나오는 로엔드를 보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데,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여기에 혁신의 그림자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특히 로엔드에서 등장하는 아이디어와 상품을 간과하면 그들에 의해 창조적 파괴를 당하기 때문에 더욱 밑바닥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 그의 조언의 핵심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새로운 성장동력도 로엔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금융산업은 로엔드를 주목하고 있을까?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지만, 국내 금융기업들은 파괴적 혁신과 창조적 파괴를 말로만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크리스텐슨의 조언은 유효하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데스(죽음을 관장하는 지하세계)를 경험해야 했다. 하데스는 그들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하데스는 기업의 출발지점이자 초심을 말한다. 기본이 충실하지 않은데 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장에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

황영기 회장은 시장을 잘 아는 금융기업이 이종격투기와 같은 로엔드를 만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시장은 금융시장의 ‘기본’이다.

기업이나 감독당국 모두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답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김승호 BI코리아 편집위원>skylink999@gmail.com